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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이혼변호사 왜 내 머리카락만 더디게 자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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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또또링3 작성일 26-08-27 09:58 조회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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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이혼변호사 머리를 짧게 잘랐는데 좀처럼 길어지지 않는다. 예전에는 한 달만 지나도 눈에 띄게 자랐던 것 같은데 요즘은 몇 달이 지나도 길이가 그대로인 느낌이다. 나이가 들수록 이런 경험을 하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머리카락이 실제로 자라는 속도가 느려진 것인지, 아니면 자라는 만큼 끊어지고 빠져 길이가 늘지 않는 것인지는 구분할 필요가 있다. 머리카락의 성장 속도는 유전적인 영향을 받지만 나이, 호르몬 변화, 스트레스, 영양 상태, 건강 상태에 따라서도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면 성장 주기도 달라진다
머리카락은 계속 자라는 것이 아니다. 성장기와 퇴행기, 휴지기를 거치는 일정한 주기를 갖는다. 나이가 들면서 이 성장 주기에 변화가 생기면 머리카락이 예전만큼 빠르게 자라지 않는 것처럼 느낄 수 있다. 피부과 전문의들은 유전, 노화, 호르몬 변화, 만성적인 스트레스, 영양 부족 등을 모발 성장 속도가 느려지는 원인으로 꼽는다. 갑상선 질환이나 철분 부족 같은 건강 문제도 영향을 줄 수 있다. 질병이나 수술, 심한 스트레스를 겪은 뒤 한동안 평소보다 머리카락이 많이 빠지는 것도 가능하다.
특히 중년 이후에는 호르몬 변화와 노화가 함께 나타나기 때문에 모발의 양과 굵기 변화를 이전보다 쉽게 체감할 수 있다.
‘안 자라는 것’이 아니라 ‘끊어지는 것’일 수도
머리카락이 자라는 속도만 생각하기 쉽지만 모발 손상도 길이를 유지하지 못하게 만드는 중요한 원인이다.
잦은 고데기와 드라이어 사용, 염색이나 펌 같은 화학적 시술, 지나치게 당기는 헤어스타일은 모발을 손상시키고 끊어지게 할 수 있다. 두피에서는 정상적으로 머리카락이 자라고 있어도 모발 중간이나 끝이 계속 끊어진다면 결과적으로 머리카락이 잘 자라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꽉 묶은 포니테일이나 올림머리를 장시간 반복하면 모낭에 지속적인 긴장이 가해져 견인성 탈모가 생길 수도 있다. 피부과 전문의들은 모근을 잡아당기는 헤어스타일을 피하고 모발에 가해지는 긴장을 줄일 것을 권한다.
머리카락도 결국 ‘잘 먹어야’ 자란다
모발 건강을 위해 가장 먼저 점검할 것은 의외로 식사다. 전문가들은 과도하게 가공되지 않은 식품을 중심으로 과일과 채소, 통곡물, 가금류, 생선, 올리브유, 견과류, 저지방 유제품 등을 균형 있게 섭취할 것을 권한다. 건강한 식사가 전반적인 신체 건강에 영향을 주고, 이것이 모발 성장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설명이다.
반대로 특정 영양소가 부족한 상태에서는 모발 건강이 나빠질 수 있다. 비타민 B군, 비타민 D, 아연, 비오틴 등이 모발 건강과 관련된 영양소로 알려져 있지만, 머리카락이 잘 자라지 않는다고 무조건 영양제를 추가로 먹는 것은 주의해야 한다.
특히 철분 부족이나 갑상선 질환처럼 탈모의 원인이 되는 건강 문제가 있다면 원인을 먼저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단순히 ‘머리카락 영양제’를 먹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두피 마사지는 성장 치료라기보다 관리법으로
두피 마사지는 집에서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이다. 피부과 전문의들은 두피 마사지를 통해 혈류를 증가시키고 긴장을 완화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전한다. 두피의 혈액순환과 모낭 주변 환경을 관리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두피 마사지만 하면 머리카락이 빠르게 자란다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강하게 문지르기보다는 손가락 끝으로 두피를 부드럽게 마사지하는 정도가 적당하다.
뜨거운 바람과 고데기는 줄여야
머리카락을 빨리 기르고 싶다면 오히려 기르는 동안 머리카락을 덜 상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뜨거운 드라이어 바람이나 고데기 같은 강한 열은 모발을 건조하게 하고 모발을 손상시켜 끊어지기 쉽게 만들 수 있다.
염색이나 펌을 자주 한다면 시술 간격을 충분히 두고, 모발과 두피에 지나친 부담을 주는 제품이나 시술을 반복하지 않는 것도 방법이다.
두피와 모발을 따로 생각하기
샴푸를 바꾼다고 머리카락이 갑자기 빨리 자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모발이 가늘어 보이는 것이 고민이라면 볼륨감을 높이는 제품을 이용해 현재 모발을 좀 더 풍성하게 보이도록 할 수 있다. 컨디셔너를 사용할 때도 모발 전체에 무겁게 바르기보다 모발 끝을 중심으로 사용하는 것이 좋다. 무거운 컨디셔너를 모근 부위에 많이 사용하면 머리카락이 눌려 볼륨이 줄어들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머리카락을 빨리 자라게 하는 ‘마법의 방법’은 없다는 것이다. 제품이나 치료를 시작했다고 며칠 만에 효과가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제품에 따라 효과를 판단하기까지 3~6개월 정도가 필요할 수 있다.
갑자기 많이 빠진다면 ‘미용 문제’로만 보지 말아야
평소보다 머리카락이 갑자기 많이 빠지거나, 특정 부위에 동전 모양으로 머리카락이 빠지는 경우, 몇 주 동안 평소보다 눈에 띄게 많이 빠지는 경우에는 피부과 등 의료기관에서 원인을 확인하는 것이 좋다. 특히 탈모와 함께 피로감, 설명하기 어려운 체중 변화, 두피 통증이나 염증 등이 나타난다면 더욱 그렇다. 갑상선 질환이나 철분 부족 등 치료가 필요한 원인이 숨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머리카락을 빨리 자라게 하는 가장 확실한 비법을 찾기보다 잘 자랄 수 있는 몸 상태를 만들고, 이미 자란 머리카락이 끊어지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이 현실적인 방법이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스톡홀름 카롤린스카 연구소 부교수) 마티아스 스트란드는 섭식장애를 앓는 환자들을 치료해온 의사이자 연구자다. 지한파 의사이기도 하다. 아관파천부터 5·18광주민주화운동까지 한국사도 잘 아는는 이였다. 그에 입에선 ‘한’과 ‘화병’이란 말도 술술 나왔다. ‘먹방’ 논문도 썼다.아내는 한국에서 태어나 스웨덴으로 간 국제입양인이다. 아내, 두 아들과 방한한 그를 지난 2일 경향신문사에서 만났다. 섭식장애 비영리단체인 ‘잠수함토끼콜렉티브’ 대표 박지니가 인터뷰를 주선했다.
다음은 기사 축약본 링크와 ‘만자인터뷰’ 목차와 내용.
- 한국 방문은 처음인가요.
“두 번째입니다. 아내는 스웨덴 이름은 린다 외스테르베리(Linda Österberg)이고, 한국 이름은 이선덕입니다. 대구에서 태어났어요. 1970년대 후반 스웨덴으로 입양됐죠. 2년 전 아내와 함께 고향 대구와 서울, 부산을 찾았습니다. 이번엔 두 아들도 왔고요. 아이들에게도 매우 특별한 경험입니다. 아내는 가을 대구 출신 입양인들과 다시 한국을 찾을 예정입니다.”
- 이번엔 제주도와 광주를 다녀오셨다고 들었습니다.
“광주는 아마 외국인 관광객들이 가장 먼저 찾는 도시는 아닐 겁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도시죠. 아름다운 자연도 있습니다. 무등산국립공원과 조금 북쪽에 있는 대나무숲(담양 죽녹원)도 다녀왔습니다.”
- 5·18 민주화운동도 아시겠네요.
“네. 이번 방문 때도 많이 배우려고 했어요. 5·18 관련 기념관과 망월동 묘지도 찾았고요. 우리 가족은 한국 역사에 관심이 많습니다. 역사를 더 깊이 알아가는 일은 입양인인 아내에게 개인적으로, 정서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죠. 2년 전까지 이 나라와 떨어져 살아왔으니까요.”
- 자기 소개 부탁드립니다.
“의사이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입니다. 스웨덴 스톡홀름의 카롤린스카 연구소(Karolinska Institutet)의 정신의학 부교수고요. ‘문화정신의학(cultural psychiatry)’ 분야에서 일합니다. 정신의학 분야의 많은 연구자는 뇌와 신경학에 큰 관심이 있습니다. 뇌 회로를 이해하고, 약물 치료법을 찾는 연구를 하죠. 그런 분야에도 관심이 있습니다만, 연구 초점을 사회와 문화가 정신의학에 대한 우리의 이해 방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둡니다. 오랫동안 임상 현장에서 섭식장애를 앓는 환자들을 치료하는 의사로 일했고요. 가장 중요한 관심사죠. 지금은 연구와 교육 활동을 주로 합니다.”
- 학계에 이름을 알린 게 2018년 논문 ‘르네 지라르와 섭식장애의 모방적 본성(René Girard and the Mimetic Nature of Eating Disorders)’인데요.
“프랑스 문화이론가이자 철학자인 르네 지라르는 매우 다양한 주제를 연구했는데, 한때 섭식장애에 관한 글도 썼어요. 지라르는 우리가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는 방식에 관심을 뒀죠. 특별한 이유가 없어도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이 인간 본성이라고 봤죠. 이를테면 ‘이웃이 새 차를 샀으니 나도 새 차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사실 그 차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닌데도, 이웃이 가졌기 때문에 갖고 싶어지는 것이죠. 친구가 유명 브랜드의 최신 티셔츠를 입고 있으면, 그 티셔츠가 꼭 필요해서가 아니라 모두가 갖고 있기 때문에 갖고 싶어지는 것과 같아요. 지라르는 이런 관점을 섭식장애에 적용했어요. 우리는 자신의 삶이나 몸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 어떤가를 끊임없이 따져본다고 분석한 거죠. 섭식장애를 현대적 현상으로도 봤어요. 사람들은 ‘나는 사회 속에서 어떻게 보일까’, ‘내 몸은 어떤 모습인가’, ‘현재의 신체 기준에 부합하고 있는가’와 같은 질문을 자신에게 던집니다. 결국 ‘나는 너무 큰가, 너무 작은가’를 끊임없이 따지죠. 그는 인간이 원래부터 서로를 비교해온 것은 사실이지만, 과거엔 이런 비교가 지금처럼 중요한 의미를 갖지는 않았다고 주장했어요. 거의 모든 문화에는 몸매나 아름다움의 기준이 존재했지만, 역사적으로는 그것들은 대체로 타고난 운 같은 거로 여겨졌습니다. 자신의 몸이 당시 미 기준과 다르더라도 큰 문제가 되지 않았고요. 몸을 바꾸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일도 드물었습니다. 과거에는 큰 몸집이 부와 성공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했죠. 돈이 있어 굶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였던 겁니다. 지라르가 강조한 점은, 당시 사람들은 오늘날처럼 끊임없이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는 않았다는 겁니다. 누군가가 아름답다고 해서 ‘나도 저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애초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라고 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 당시 교회와 종교, 가족 중심의 위계 같은 사회적 장치들이 사람들 사이의 비교 심리를 어느 정도 완화해 주는 역할을 했다고도 봤어요. 시간이 흐르면서 그런 장치들의 영향력이 점차 약해졌죠. 사회적 이동 가능성이 커질수록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 현실 목표가 되었고요. 이런 점들이 매우 흥미로웠죠. 문화와 사회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통찰을 제공하는 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지라르의 설명은 다소 단순한 측면도 있다고 봤습니다. 그의 이론이 어디까지 설득력이 있는지 살펴보려고 이 논문을 썼어요.”
- 한국의 섭식장애 상황을 아시는지요.
“조금 놀랐습니다. 한국의 섭식장애 관련 의학 논문들을 보면 한국은 섭식장애가 매우 빠르게 증가하고, 중요한 공중보건 문제로 떠오르는 국가로 자주 언급돼요. 직접 보니, 섭식장애에 대한 사회적 논의나 대중 인식은 생각보다 크지 않은 것 같아요. 관련 전문병원이 많이 있고 사회적 관심도 높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그렇지 않은 듯했습니다. 외부인 시각에서 보면 한국에서는 섭식장애보다 자살 문제가 훨씬 더 많이 이야기되는 것 같아요. 공적인 논의에서도 더 자주 다뤄지는 주제처럼 보였고요. 왜 그런지 궁금했습니다. 외부인인 제가 그 이유를 단정해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만, 한 가지 가능한 요인은 학업 성취에 대한 강한 압박이라고 생각해요. 한국의 젊은이들은 좋은 성적을 받고, 더 높은 교육을 받고, 좋은 직장을 얻어야 한다는 엄청난 기대 속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학업 경쟁은 어느 나라에나 있지만, 한국은 그 정도가 두드러져 보이죠. 앞서 이야기한 사회적 비교와도 연결됩니다. 최근 저는 매우 흥미로운 팟캐스트 인터뷰 두 편을 들었습니다. 하나는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인 나종호 박사 인터뷰였고, 다른 하나는 인구학자인 조영태 교수 인터뷰입니다. 나 박사는 한국 자살 문제를, 조 교수는 저출생 문제를 이야기했는데, 두 분 모두 교육과 직업, 사회적 지위를 둘러싼 비교 문화, 특히 소셜미디어를 통한 사회적 비교를 한국 사회의 중요한 문제로 지적하더군. 이런 현상이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그 점이 매우 인상적이었어요. 어제 16살인 큰아들이 이런 질문을 했어요. ‘왜 길거리나 지하철에 또래 청소년이 거의 없어요? 한 명도 안 보이는 것 같아요’라고요. 어른들과 노인, 어린아이들은 많이 보이는데 자기 또래는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었죠. 스웨덴에서는 청소년들을 어디서나 볼 수 있는데 말이죠. 저희도 이유를 찾아봤는데, 제가 이해하기로는 낮에는 학교에 있고 저녁에는 학원에 가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유시간이 많지 않은 것이죠. 그렇게 공부에 많은 시간을 쏟아야 한다면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으리라 생각했어요.”
- 한국에서는 섭식장애를 개인 의지나 자기관리 문제로 보는 인식이 강한데요,
“일반 대중이 꼭 이해하면 좋겠다 점이 있습니다. 섭식장애를 개인 실패나 의지 부족으로 봐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섭식장애를 겪는 사람을 단순히 ‘먹기를 거부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과거 섭식장애 진단 기준엔 섭식장애를 ‘먹기를 거부하는 것(refusal to eat)’이라고 표현한 적도 있습니다. 마치 본인이 의식적으로 그런 선택을 하는 것처럼 말이죠. 제 임상 경험은 그렇지 않아요. 처음엔 다이어트를 하거나 몸을 바꾸려는 의식적, 혹은 반쯤 의식적인 선택에서 시작하기도 해요. 일단 섭식장애가 자리 잡으면, 더는 자신의 선택으로 조절 가능한 문제가 아닌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또 대부분의 환자는 그 상태에서 벗어나고 싶어 해요. 하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병에 갇혀 버리는 거죠. (가족과 친구들이) 논쟁을 벌인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더 많이 먹어야 해’라고 말한다고 해서 행동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섭식장애는 사실을 모르거나 태도를 바꾸는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환자에게는 포괄적, 전문적 치료가 필요하죠. 무엇보다 섭식장애에 대한 낙인을 줄이는 일이 중요해요. 사람들이 이 문제를 공개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고 느끼지 못한다면, 도움을 요청할 가능성도 훨씬 낮아질 것입니다. 제가 가장 전하고 싶은 메시지입니다.”
- 섭식장애 치료에서 중요한 점들은 무엇인가요.
“지금 치료는 체중 회복, 즉 가능한 한 빨리 체중을 늘리는 데 큰 비중을 두는 경우가 많아요. 섭식장애를 일으킨 근본 원인을 알아내려는 데는 상대적으로 많은 시간을 쓰지 못하죠. 원인들이 쉽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치료는 ‘잘 먹으면 기분도 좋아지고, 악순환에서도 벗어나기 쉬워진다’는 생각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요. 단기적으로는 그런 접근이 효과를 보일 때가 많습니다만, 동시에 중요한 문제를 함께 다뤄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의미 있는 삶을 만들어갈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오랫동안 섭식장애를 앓아온 사람들에게 이 점이 매우 중요해요. 이미 거의 모든 치료를 경험한 이들이 많아요. 열 번, 스무 번 치료를 받기도 하고, 그런 과정이 10년, 20년에 걸쳐 이어지기도 합니다. 그런 단계에 이르면 먹는 행동 자체를 바꾸는 데만 집중하는 거로는 충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건 ‘왜 변해야 하는가’에 관한 이유입니다. 때로는 음식 자체보다 삶과 다시 연결하도록 도울 때 치료가 더 효과적이죠. 의미 있는 활동을 찾고, 친구를 사귀고, 학교로 돌아가거나 일을 시작하도록 돕는 거죠. 사람은 직장이나 학교에 다니고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기 시작하면, 다른 변화도 이루고 싶다는 동기를 얻을 때가 많아요. 자신에게 중요한 일들을 하려면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사실도 자연스럽게 깨닫죠. 장기간 섭식장애를 겪은 사람들에게는 이런 접근이 더 효과적일 수도 있어요. 두 접근 모두 가치가 있습니다만, 오랜 기간 병을 앓아온 사람이라면 음식에만 집중하기보다 의미 있는 삶을 다시 세우는 데 더 무게를 두는 게 현명할 수 있습니다.”
- ‘의미’는 무엇인지요.
“제가 말하는 ‘의미’는 삶의 거대한 철학적 의미를 찾거나 종교적 깨달음을 얻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질병 때문에 잃어버렸던 평범하지만 소중한 일상을 되찾도록 돕는다는 뜻의 의미입니다. 20년 동안 섭식장애를 앓은 사람이라면 학교를 그만두고, 일도 하지 못하며, 친구들과도 연락이 끊겼을 수 있어요. 섭식장애는 사회적 관계에도 큰 영향을 미칩니다. 많은 사회적 활동이 음식을 함께하는 자리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 카페에 가는 일도 어려워질 수 있어요. 우리는 카페에 단지 무언가를 먹기 위해 가는 것이 아니라 친구를 만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려고 갑니다. 그 자리에는 결국 음식이나 음료가 나오죠. 이런 상황이 매우 힘든 사람이라면 사회적 경험을 많이 놓치게 됩니다. 회복의 중요한 과정 중 하나는 사회적 삶으로 다시 돌아가는 길을 찾는 겁니다. 누군가가 다시 친구들을 만나기 시작하고 그 시간이 즐겁다고 느끼면, ‘오늘 참 좋았다. 내일도 또 그러고 싶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런 일들을 하려면 에너지가 필요하고, 그러려면 먹어야겠구나’라는 깨달음으로 이어질 수 있죠. 치료가 다른 무언가의 자연스러운 결과처럼 따라오는 거죠. 음식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참여하고 싶은 삶을 먼저 만들어가는 것에서 시작하는 접근 방법이죠. 이런 설명이 얼마나 설득력 있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대체로 이런 방식의 섭식장애 치료를 우선 생각합니다.”
- 섭식장애의 발생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 요인은요.
“우리는 종종 섭식장애를 ‘내가 어떻게 보이는가’라는 문제로 축소해 생각하죠. 하나의 고정관념입니다. 섭식장애라고 하면 젊고, 백인이고,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여성이나 유명인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섭식장애를 외모에 대한 집착, 또는 가장 아름답게 보이고 싶어 하는 욕망과 연결해서 생각하기 때문이죠. 어떤 사람들에게는 섭식장애가 다이어트를 하거나 몸을 바꾸고 싶다는 생각에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제 경험으로는 그것이 단순히 허영심 때문인 경우는 많지 않아요. 예를 들어 학교에서 체중 때문에 놀림이나 조롱을 받은 사람은 필사적으로 체중을 바꾸려 하죠. 처음에는 그것이 의식적인 선택일 수도 있습니다만, 그 과정에는 다른 요소들도 함께 작용하는 경우가 많아요. 적어도 서구 사회, 예를 들어 스웨덴에서 사람들에게 ‘더 날씬해지고 싶으냐’, ‘더 운동선수 같은 몸을 갖고 싶으냐’고 물으면 대부분이 ‘그렇다’고 답할 겁니다. 거의 모든 사람이 몇 킬로그램을 빼고 싶어 하거나, 더 탄탄하고 운동선수 같은 몸을 원하겠죠. 남성이라면 근육을 더 키우고 싶어 할 거구요. 이처럼 많은 사람이 자신의 외모를 바꾸고 싶어하죠. 안타까운 현실입니다만, 그렇다고 모두가 섭식장애를 겪는 건 아니죠. 극히 일부만 섭식장애를 겪습니다. 사회적 압박 외에 다른 요소도 작용합니다. 단순히 특정한 모습이 되어야 한다는 압박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통제감을 얻으려는 욕구도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해요. 환자들은 자신이 많은 것을 통제할 수 없다고 느끼는 세상 속에서 살아간다고 자주 이야기해요. 직장이나 학교에서 받는 스트레스, 특정한 모습이어야 한다 같은 압박 등이 있고, 그 가운데 자신이 진정으로 통제할 수 있다고 느끼는 건 자기가 무엇을 먹는지뿐일 수 있어요. 환자들한테서 이런 이야기를 자주 들어요. ‘다른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요.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받아야 했고, 일을 해야 했고, 승진해야 했고, 많은 것을 이루려고 노력했어요. 그런 것들은 제 뜻대로 되지 않아요. 적어도 먹는 건 제가 통제할 수 있었습니다.’ 거식증으로 발전하고, 체중을 크게 감량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성격 특성도 어느 정도 역할을 할 수 있어요. 완벽주의적인 성향이 어느 정도 없다면 그렇게까지 해내기는 매우 어려울 수 있는 거죠. 섭식장애 발생엔 완벽주의적이고 성취 지향적인 성향 같은 요소가 작용할 수 있어요. 모든 사람에게 해당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고요. 다시 강조하고 싶은 점은, 일단 섭식장애가 마음을 장악하고, 체중 감소가 시작되면 그것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가 된다는 겁니다. 이건 의지력의 문제가 아니라 질병에 더 가깝습니다. 유전적인 요소도 있어요. 가족 중에 섭식장애를 앓는 사람이 있다면 본인도 섭식장애를 겪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유전적 요인 역시 중요한 요소입니다. 결국 단 하나의 원인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여러 가지 요인이 함께 작용합니다. 저는 우리가 함께 먹는 방식의 변화도 생각해요. 혼자 사는 사람이 늘고, 혼자 식사하는 경우도 많아졌죠.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식사하지 않는 경우도 늘고요. 식사는 하나의 과제가 되어가죠. 더는 즐겁거나 기쁜 일이 아니게 되는 거죠. 가족이나 다른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는 경험과 연결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신 단순히 해야 하거나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이 되어버리는 것이죠. 이 또한 우리가 살아가고 먹는 방식이 변하면서 나타난 사회적 변화의 일부라고 생각해요. 모든 사람이 똑같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그것 역시 또 다른 고정관념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게 가능한 설명 가운데 하나일 수 있죠.”
-가족이나 친구, 동료들은 섭식장애를 겪는 이들을 어떻게 이해하는 게 좋을지요.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섭식장애를 겪는 사람과 갈등을 벌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길 수 없는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그보다는 ‘당신이 힘들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내가 도와주고 싶다’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 훨씬 중요해요. ‘더 먹어야 한다’, ‘바나나 하나만 먹어봐라’, ‘생각을 바꿔야 한다’고 설득하는 방식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섭식장애는 단순히 태도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장 좋은 건 그 사람을 지지해주고 곁에 있어주는 일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환자와 섭식장애를 구분해서 바라보는 겁니다. 시간이 지나면 사람과 질병이 하나처럼 여겨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질병에는 단호하게 대응하되, 사람에게는 따뜻하게 대해야 합니다.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가족이나 친구들은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도와야 하는지 몰라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습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조언은, 음식이나 식사와 관련된 사실을 놓고 반복해서 논쟁하거나 갈등을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신 가능한 한 지지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전문적인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데 힘을 쓰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이 제가 가장 권하고 싶은 방법입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요, 가족 안에서도 부모가 서로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어머니는 ‘우리 아이가 지금 많이 힘들어하고 있으니 치료가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반면 아버지는 ‘그냥 마음가짐의 문제야. 샌드위치나 김밥 하나 먹으면 되는 거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부모가 섭식장애를 질병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단순한 태도나 의지의 문제로 볼 것인지를 두고 서로 의견이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를 도우려면 부모가 같은 이해를 공유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는 서로 다른 두 가지 메시지를 받게 되죠. 한쪽에서는 ‘행동을 고치면 된다’고 말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치료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겁니다. 이 두 접근은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 경제력은 관계가 없나요.
“섭식장애 발병 요인엔 ‘식량 빈곤(food poverty)’이나 ‘식량 불안정(food insecurity)’도 있어요.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영양가 있는 음식을 안정적이고 지속적으로 구하지 못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한국에서도 활발히 논의되는 주제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만, 이러한 현상 자체는 분명 존재해요. 유럽과 북미에서는 매우 현실적 문제이죠. 최근 몇 년간 인플레이션으로 더 심화한 것으로 보입니다. 식량 불안정과 섭식장애의 연관성을 보여주는 연구가 상당히 축적돼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음식에 대한 접근이 불규칙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돈이 생기면 충분히 먹지만, 이후에는 한 달 내내 식비를 줄이거나 인스턴트 라면만 먹으며 버티는 상황이 반복될 수 있는 거죠. 이렇게 먹었다가 줄이는 일이 반복되는 ’요요식 식사 패턴‘이 형성되면 결국 건강에 해로운 식습관으로 이어지고요.”
- 박사학위 논문에서 중증 신경성 식욕부진증 환자를 위한 치료법으로 ‘자기 입원(self-admission)’을 제시하셨는데요.
“자기 입원이 앞서 이야기한 내용과 연결돼요. 환자와 논쟁을 벌이면서 맞서 싸우지 않는 겁니다. 예를 들어 ‘당신은 이 정도는 먹어야 합니다’라고 설득하려고 하는 방식 말입니다. 섭식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이미 많은 것을 찾아본 경우가 많습니다. 인터넷에서 정보를 검색하죠. 예를 들어 각 음식에 얼마나 많은 열량이 들어 있는지도 정확히 알죠. 이런 사람과 논쟁해서 이기는 건 매우 어려워요. 자기 입원 접근은 더 큰 치료 철학의 일부입니다. 환자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에 더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당신에게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이죠. 앞서 말씀드렸듯이, 여기서 말하는 의미는 삶의 의미 자체를 찾는다는 뜻이 아니라, 환자에게 무엇이 의미 있는지를 찾는다는 뜻입니다. 병원이나 진료 현장에서 흔히 나타나는 문제는 치료가 일종의 싸움이 되는 겁니다. 의사는 ‘이렇게 해야 합니다’라고 말하고, 환자는 ‘그렇게 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의사는 다시 ‘아니요, 반드시 해야 합니다’라고 주장하면서 결국 서로 다른 의지가 충돌하는 상황이 생겨요. 자기 입원에선 환자에게 더 많은 권한을 주며 협력하려고 하죠. ‘선택은 당신에게 있습니다. 당신은 자신의 삶에서 무엇을 하고 싶습니까? 우리는 당신을 도울 수 있습니다’라며 접근하는 거죠. 기본적으로 자기 입원이란 환자가 필요하다고 느낄 때 언제든 병원에 올 기회를 제공하는 겁니다. 일종의 이용권을 갖는 것과 같아요. 예를 들어 환자가 ‘제 식사 상태가 다시 나빠져 이틀 정도 병원에 있고 싶어요’라고 말할 수 있죠. 의사가 ‘당신은 치료를 위해 입원해야 합니다’라고 요구하고, 환자가 ‘싫습니다. 절대 입원하지 않겠습니다’라고 거부하는 상황과는 다르죠. 우린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결정권은 당신에게 있습니다. 원할 때 언제든 올 수 있습니다. 바로 치료를 받을 수 있고요’. 더는 싸움이 아닌 거죠. 우리는 단지 하나의 선택지를 제공하는 겁니다. 말하자면 치료의 규칙 자체를 바꾸는 거죠. 이 방식은 환자가 언제 치료가 필요한지, 자신에게 어떤 신호가 나타나는지 스스로 생각하도록 돕죠. 환자는 ‘내 상태가 다시 나빠진다. 섭식장애가 심해진다. 다시 방향을 잡으려면 하루나 이틀 정도 병원에 있어야 할 수도 있겠다’고 깨달을 수 있죠. 이것이 이 접근법의 철학 가운데 하나입니다. 환자가 스스로 치료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순간, 도움을 요청할 기회를 제공하는 거죠.”
- 환자에 대한 신뢰를 기본으로 하는 치료법 같습니다.
“그간 환자의 회복 탄력성(resilience)에 관해 더 많이 이해하게 됐어요. 환자들의 강점에 관한 겁니다. 단지 회복 과정에서의 강점뿐 아니라, 더 넓은 의미에서 삶의 문제를 감당해내는 능력에 관한 거죠. 스웨덴에서 해온 이주민 건강 연구와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는 아직 상대적으로 이주민 인구가 많지 않은 것으로 알지만, 스웨덴에는 상당히 큰 이주민 공동체가 있습니다. 스톡홀름 인구의 약 20%는 다른 나라에서 태어났고, 제 생각에는 약 45%가 다른 나라에서 태어난 부모를 적어도 한 명 두고 있습니다. 제 아이들도 그렇죠. 어머니가 한국에서 태어났으니까요. 이주민 건강 분야에서 일하면서 사람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한 존재라는 점을 배웠습니다. 정신의학은 주로 사람들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어요. 그들에게 도움이 필요하고, 또 그들이 고통받고 있다는 점을 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은 놀라울 정도로 회복력이 있습니다.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그것을 견디고 결국 헤쳐나갑니다. 최근 제가 점점 더 많이 생각하는 정신의학의 질문도 사람들이 가진 진정한 강점은 무엇인가,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그 강점을 활용하도록 도울 수 있을까에 관한 겁니다.”
- 스웨덴 연구자가 먹방 논문(‘먹방과 섭식장애적 식행동: 온라인 먹방 방송에 대한 네트노그래피 분석·(Mukbang and Disordered Eating: A Netnographic Analysis of Online Eating Broadcasts, 2020)’를 썼다는 점을 여러 독자 흥미롭게 생각할 것 같습니다.
“처음 관심을 둔 건 몇몇 환자들이 먹방을 본다는 이야기를 들은 뒤입니다. 스웨덴에서는 먹방이 한국에서 시작됐다는 이야기를 자주 언급하죠. 이 연구를 시작한 이유는, 먹방이 한국에서 시작됐지만 약 10년 전부터 유럽과 미국에서도 매우 인기를 끌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먹방을 본 이유는 그것이 낯설고, 재미있거나, 극단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연구팀)는 섭식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먹방을 다르게 받아들이는지 알고 싶었어요. 먹방은 매우 극단적인 방식의 식사 형태입니다. 서구의 먹방은 원래 한국에서 시작된 형태보다 더 극단적인 방향으로 변했다고 생각해요. 한국 먹방은 처음에는 혼자 식사하는 사람들이 함께 먹는 느낌을 얻기 위한, 조금 특이한 사회적 활동에 가까운 형태로 시작했습니다. 서구 먹방에서는 엄청나게 큰 그릇에 담긴 음식을 먹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는데, 저는 그게 먹방의 원래 취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주로 먹방을 서구 시청자 관점에서 살펴보며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많은 이용자가 영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한국 사이트보다는 유튜브와 레딧을 중심으로 분석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단순히 ‘맛있어 보인다’, ‘저건 역겹다’ 같은 반응을 남겼죠. 하지만 섭식장애를 앓는 사람들의 댓글에서는 좀 더 구체적인 경험과 생각이 나타났어요. 어떤 사람들은 먹방을 보는 것이 자신의 증상을 악화한다고 말했어요. 이미 과식하는데, 다른 사람이 그렇게 많이 먹는 모습을 보면 자신도 같은 방식으로 먹고 싶어지게끔 자극이 된다고 했죠. 반대로 어떤 사람들에게는 도움이 되기도 했습니다. ‘저 사람은 많이 먹고 있네. 나도 섭식장애에서 회복하려면 조금 더 먹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겁니다. 먹방은 섭식장애가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도, 해가 될 수도 있던 거죠.”
-2023년엔 논문 ‘이주 배경, 섭식장애 증상과 의료서비스 이용(Migration Background, Eating Disorder Symptoms and Healthcare Service Utilisation)’을 쓰셨습니다. 이주민과 소수자 공동체의 정신건강을 연구하신 이유는요.
“현재 이주민과 소수자 공동체의 정신건강을 많이 연구하고 있어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여전히 섭식장애를 젊은 백인 여성에게 나타나는 질환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남성 가운데도 섭식장애를 겪는 사람이 많아요. 섭식장애가 여전히 여성 질환이라는 고정관념이 강하기 때문에, 남성들은 오히려 도움을 요청하지 못할 때가 자주 있고요. 치료를 받는 데 장벽이 되는 거죠. 섭식장애 전문 클리닉에 가는 것조차 망설일 수도 있고요. ‘그건 여자들만 걸리는 병 아니냐’는 시선을 받을까 걱정들을 하죠. 스웨덴에서 많은 흑인 여성과 아시아계 여성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는데, 이런 말들을 해요. ‘나는 분명 고통받고 있는데, 섭식장애는 백인들의 병이라고 여겨집진다. 나는 흑인이고, 아시아인이고, 라틴계인데, 내가 어떻게 섭식장애를 앓을 수 있겠느냐는 시선을 받는다.’ 이런 고정관념은 사람들이 자신을 섭식장애 환자로 인식하지 못하게 만들고, 결국 도움을 구하는 데 큰 장벽이 되죠. 우리가 인터뷰를 한 내용과 공중보건 자료를 분석한 결과는 달랐습니다. 스웨덴에서는 이주민 집단에서 백인 스웨덴인보다 섭식장애 증상이 더 흔하게 나타났어요. 분명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지만, 여러 이유로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거나 의료서비스에 접근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뜻이죠. 물론 스웨덴은 유럽에서도 이주민 비율이 높은 국가 중 하나라 이런 결과는 어느 정도 스웨덴의 특수한 상황을 반영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섭식장애는 중요한 문제인데, 만약 제가 스웨덴 사람들에게 ‘한국에서도 섭식장애가 흔하다’고 말한다면, 아마 많은 사람이 믿지 않을 겁니다. ‘아니, 그건 서구 사회의 문제잖아. 백인들에게 나타나는 질환 아닌가?’라고 말할 가능성이 크죠. 섭식장애가 얼마나 세계적인 문제인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 음식과 요리, 식사가 트라우마와 망명, 인종차별에 따른 감정과 정서가 드러나는 공간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앞선 말한 맥락에서 음식과 요리는 문화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이주민들은 많은 것을 잃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아요. 많은 난민이 전쟁을 피해 스웨덴으로 왔어요. 모든 것을 두고 떠나야 했죠. 소지품도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가족이나 친척을 잃은 사람도 있고요,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전쟁으로 목숨을 잃은 이들도 있습니다. 이주민들은 새로운 나라에서 삶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이들에게 여전히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게 음식이죠. 바로 고향의 조리법입니다. 거의 모든 것을 잃었지만, 어린 시절 먹었던 음식을 직접 만들어 먹을 수 있죠. 음식이 이주민들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죠. 미국이나 호주에 사는 한국인들도 비슷할 것입니다. 한국 음식은 자신과 한국을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됩니다. 음식은 자부심의 대상이기도 하고, 삶을 버틸 힘을 주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음식은 문제의 일부가 될 수도 있어요. 제가 만난 많은 난민과 이주민들은 생계를 위해 계속 일해야 했기 때문에 함께 식사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워 서너 개 일을 동시에 하는 사람도 많아요. 부모는 집에 거의 없고, 자연스럽게 가족이 함께 식사하는 문화도 사라지죠. 아이들은 전자레인지에 냉동식품을 데워 먹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게 되면 음식은 사랑이나 공동체를 경험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단지 해야 하는 일, 처리해야 하는 과제가 되어버리죠. 그것이 또 다른 문제를 만들어낼 수 있는 거죠. 또 하나 자주 들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시아나 아프리카 출신 이주민들 가운데 상당수가 백인이 다수인 스웨덴 사회에서 성장하면서 외모 때문에 놀림을 받거나, 피부색이나 생김새가 매력적이지 않다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고 했어요. 그들 중 일부는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외모의 유일한 요소가 체중뿐이라고 말하죠. 피부색이나 머리카락은 바꿀 수 없지만, 적어도 전형적으로 마른 백인 여성의 몸에 가까워지려고 노력할 수는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이것 역시 사회에 받아들여지고, 그 사회에 속하려는 노력의 한 형태라 볼 수도 있고요.”
- 이주민들이 가장 흔하게 겪는 심리적 어려움은 무엇인가요.
“앞서 제가 사람들이 가진 강점에 주목하려고 한다고 말했죠. 대부분의 이주민은 매우 강한 회복력을 지녔어요. 새로운 나라에서 다시 삶을 시작하고, 사회에 적응하고, 일자리를 구하고, 자녀들에게 더 나은 삶을 만들어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죠. 심리적인 어려움을 겪더라도 많은 사람이 결국 그것을 극복하고 자신의 목표를 이뤄냅니다. 다만 일부 이주민들은 여전히 고향과 정서적으로 깊이 연결돼 있어요. 고국에서 전쟁이 벌어질 수 있고, 가족이나 친척들이 여전히 그곳에 살고 있어 늘 걱정하죠. 현재 사는 나라보다 자신이 떠나온 나라 상황에 더 많은 관심과 에너지를 쏟게 됩니다. 현지 언어를 배우거나 새로운 사회에 적응하는 데 충분한 시간을 쓰기 어려운 때도 있죠.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큰 어려움이 되기도 합니다. 또 하나는 세대 간 차이에서 오는 갈등입니다. 스웨덴에는 부모가 대부분의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문화에서 온 이주민 가정이 많아요. 가족 내 위계가 비교적 뚜렷한 문화죠. 아버지가 ‘외출하면 안 된다’, ‘남자친구나 여자친구를 사귀면 안 된다’고 말하면, 그것이 곧 규칙이 됩니다. 반면 전형적인 스웨덴 가정은 상대적으로 위계가 강하지 않습니다. 청소년들이 연애하거나 스스로 더 많은 결정을 내리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죠. 부모도 자녀에게 기대를 하고 조언을 하지만, 가족 내 위계는 훨씬 약한 편입니다. 그래서 스웨덴에서 자라는 이주민 가정의 자녀들은 종종 두 문화 사이에 놓이게 됩니다. 부모는 고국의 문화와 기준에 맞게 자녀가 행동하기를 바라지만, 아이들은 스웨덴에서 성장하면서 친구들처럼 살아가고 싶어하죠. 그 결과 두 문화 사이에 끼어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죠. 그것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상당한 어려움이 되기도 합니다.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요. 분명 두 문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큰 장점입니다. 두 개 이상의 언어를 구사하는 게 사회에서 자기 자리를 찾는 데 도움도 되고요. 여러 나라에서 살아가거나 일할 기회도 넓어져요. 이주민으로 살아가는 데는 많은 강점도 있습니다. 다만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이 때로는 가족 안에서 갈등이나 어려움을 만들어낼 수 있죠.”
- 선생님께서는 이주와 트라우마, 정신건강을 연구해오셨는데, 국제입양(인) 문제는 어떻게 보시는지요.
“스웨덴에서도 국제입양을 단계적으로 중단해야 한다는 제안이 나왔어요. 정부위원회가 그런 권고를 했고, 현재는 국제입양 자체도 매우 드문 편입니다. 완전히 중단하자는 논의도 이어지고요. 입양인과 다른 이주민을 비교해 보면 공통점도, 차이점도 있습니다. 이주민은 두 문화 사이에서 살아간다는 점이 어려울 수 있는데 동시에 두 문화 모두에 접근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긍정적인 자산이 될 수 있죠. 예를 들어 한국인 부모를 따라 스웨덴으로 이주한 가정의 자녀를 생각해보죠. 그 아이는 스웨덴어를 하고, 스웨덴 친구들이 있으며, 스웨덴 문화를 이해합니다. 동시에 한국어도 할 수 있고 한국에 갈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두 세계 모두에 속할 수 있죠. 한국에서 입양된 경우는 다를 수 있습니다. 스웨덴어만 알고, 백인들 사이에서만 성장했으며, 다른 한국인을 거의 만나본 적도 없고, 한국에 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을 수 있죠. 제 아내가 그런 경우입니다. 아내는 모든 것을 스스로 찾아가야 했습니다. 1980~90년대에는 입양아에게 자신의 출생국을 가르쳐주는 게 일반적인 문화가 아니었어요. 많은 입양인이 길을 잃은 듯한 느낌을 받는다고 여겼죠. 두 문화 사이에 있지만, 긍정적인 의미의 ‘사이’가 아닌 거죠. 스웨덴에서 사람들은 입양인을 보고 ‘저 사람은 스웨덴 사람이 아니라 한국인처럼 보인다’거나 ‘아시아인처럼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정작 본인은 한국 문화에 접근할 기회가 거의 없어요. 한국을 자신의 문화로 받아들이거나 자랑스럽게 여길 기회 자체가 없었죠. 스웨덴 입양인들이 정신건강 문제를 흔히 겪는 이유 중 하나라고 봐요. 예를 들어 자살을 시도하거나 자살로 사망할 위험은 입양인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4~5배 높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어요. 안타깝게도 매우 흔한 문제입니다. 정확한 이유는 아직 알지 못하지만, 저는 그 배경에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다’는 감각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완전히 스웨덴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한국인도 아닌 상태이죠. 반면 한국에서 스웨덴으로 이주한 가정의 경우라면, 자녀는 스웨덴 사회의 일원이 되면서 동시에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자연스럽게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죠. 자신의 문화적 뿌리가 이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입양인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 연결을 잃어버렸습니다. 자신의 뿌리와 단절된 거죠. 어떤 사람들에게는 매우 힘든 경험이 됩니다. 모든 입양인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출생국에 크게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제 경험으로는 많은 입양인이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 자신의 뿌리에 접근할 수 없다는 사실을 힘들어합니다. 어느 쪽이 더 좋다고 단정해서 말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마다 다를 것입니다. 어떤 입양인들은 ‘나는 스웨덴인이다. 다른 나라는 중요하지 않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입양인들은 스웨덴 사회에서도 항상 스웨덴인으로 받아들여지는 건 아닙니다. 인종차별을 경험하는 때도 많아요. 아시아인이나 아프리카인, 혹은 라틴아메리카인처럼 생겼다는 이유로 놀림을 받기도 합니다. 백인 스웨덴 가정에서 자라도 자신을 100% 스웨덴인이라고 느끼기 어려운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출생국과도 연결되어 있지 않죠. 그쪽에도 접근할 수 없으니까요. 저는 그것이 입양인들이 겪는 어려움의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 최근 유럽의 반이민 정서 확산, 이민 정책의 강화 같은 사회적·정치적 변화가 이주민들의 정신건강과 일상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보시나요.
“정치권이 가족 재결합을 훨씬 어렵게 만들어버렸어요. 예를 들어 먼저 스웨덴에 온 아버지가 나머지 가족을 데려오려 해도 그 절차가 과거보다 훨씬 까다로워졌어요. 자신이 스웨덴에 계속 머물 수 있는지를 확신하기까지 걸리는 시간도 훨씬 길어졌고요. 이제 최종적으로 체류가 허용된다는 확신을 하기까지 약 8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그처럼 불확실한 상태에서 살아가는 건 정신적으로 매우 힘든 일입니다. 계속 머물 수 있을지, 떠나야 할지, 가족이 합류할 수 있을지, 아이들이 친구들과 헤어져 다른 곳으로 옮겨가지 않고 계속 학교를 다닐 수 있을지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상태니까요. 자신이 이 나라에 남을 수 있을지조차 알지 못한다는 사실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만들어내죠. 이것이 엄격한 이민 정책이 가져오는 가장 큰 문제 중 하나에요. 사람들의 미래를 훨씬 더 불확실하게 만들고, 그 결과 사회에 성공적으로 적응하는 데도 큰 걸림돌로 작용하게 하죠. 국가에도 결코 좋은 일이 아닙니다. 스웨덴도 한국처럼 출생률이 매우 낮습니다. 물론 스웨덴이 한국보다는 조금 높지만, 여전히 상당히 낮은 수준입니다. 인구가 고령화되면 노인은 늘어나고 그들을 부양할 젊은 인구는 줄어듭니다. 결국 스웨덴에는 더 많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물론 많은 사람은 교육 수준이 높고 기술을 갖춘 이주민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제 생각에는 이주민을 환영하고, 그들이 안전하다고 느끼도록 돕는다면 이주민들이 교육을 받고 일자리를 얻어 사회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이주민은 그렇게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반대로 자신이 계속 머물 수 있을지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오랫동안 기다리게 하는 것은 그들의 고통만 키울 뿐입니다. 동시에 사회에 생산적으로 기여하기도 훨씬 어렵게 만듭니다.어떤 관점에서 보더라도, 지나치게 엄격한 이민 정책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 ‘정신과 의사’시니, 관련 질문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정신질환을 두고 한 사람의 문화적 배경과 삶의 역사, 사회적 경험을 함께 이해해야 더 정확한 진단과 효과적인 치료가 가능하다고 말씀하시는데, 그 이유는요.
“정신의학에서는 정신질환을 여전히 뇌 질환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문화는 일종의 배경이나 맥락 정도로 여겨질 뿐, 특별히 중요한 요소는 아니라고 보는 경우가 많죠. 저는 문화 역시 훨씬 더 큰 그림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뇌는 중요합니다. 사회와 문화도 마찬가지로 중요하고요. 특히 문화는 우리가 고통과 괴로움을 어떻게 표현하고, 또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큰 영향을 미치죠.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배우자를 잃은 뒤 가끔 그 사람 목소리가 들리거나, 곁에 있는 것 같은 존재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고 해봅시다. 어떤 문화에서는 이를 애도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자연스러운 경험으로 받아들이죠. 고인이 자신을 찾아와 아직 함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아름다운 경험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이런 문화에서는 이상하거나 두려워해야 할 일이 아니라, 슬픔을 겪는 과정의 일부로 이해됩니다. 다른 사회나 문화, 특히 생물의학적 관점이 강한 환경에서는 ‘환청을 듣고 있다. 정신병적 증상이다. 약물치료가 필요하다’고 여길 겁니다. 이처럼 문화는 무엇을 정상으로 보고, 무엇을 병적인 반응으로 볼지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음식도 비슷합니다. 무엇이 정상적인 식사인지, 음식과 어떤 관계를 맺는 것이 자연스러운지는 문화마다 상당히 다릅니다. 문화를 정신의학의 부차적인 요소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히려 정신의학을 이루는 핵심 요소 가운데 하나죠.”
- 생물학이나 뇌 연구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전 반대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문화와 생물학은 항상 함께 작동한다고 봐요. 문화는 우리의 생물학에 영향을 미치고, 생물학 역시 문화에 영향을 미칩니다. 둘은 완전히 분리된 영역이 아닙니다. 둘은 긴밀하게 연결돼 있죠. 다만 지난 30년 정도 정신의학은 뇌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밝히는 데 큰 노력을 해왔죠. 우울증의 신경생물학적 원인은 무엇인지, 정신병의 신경생물학적 원인은 무엇인지, 어떤 약물이 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계속 연구했습니다. 분명 진전은 있었습니다만, 획기적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뇌를 이해하려는 역사를 되돌아보면, 우리는 아직도 뇌를 충분히 이해했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1990년대는 ‘뇌의 시대(Decade of the Brain)’로까지 불렸지만 말입니다. 그때는 곧 뇌에 관해 거의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처럼 기대했죠.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우리는 뇌에 대해 생각보다 아주 작은 부분만 알 뿐입니다. 정신질환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도 아직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죠. 그래서 저는 다른 측면들도 함께 강조하는 게 중요하다고 봐요.”
-‘Culture, Medicine, and Psychiatry’과 인터뷰하면서, 정신과 진료에서 환자나 타인에 대해 “100%의 공감은 불가능하다”고 말하면서도, “완전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더 많이 묻고 함께 의미를 만들어 가야 한다”는 태도를 핵심으로 제시했는데요.
“공감(empathy)에 관한 질문은 조금 더 철학적인 이야기입니다. 제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정신의학이나 더 넓게는 의료에서는 종종 ‘환자를 완전히 이해해야만 제대로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입니다. 정신치료에서는 ‘당신을 이해하면 당신을 도울 수 있다’는 생각이 흔합니다. 하지만 저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완전히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사람이고, 서로 다른 문화에서 자랐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정도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겠지만, 다른 사람 마음속을 완전히 들여다보고 모든 것을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죠. 저는 그것이 괜찮다고 생각해요. 더 중요한 건 호기심을 잃지 않고 계속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태도죠. 진료실에서 환자를 이해하기 어렵다고 느낄 때가 제게는 더, 또 매우 의미 있는 순간이 되고요. 나이 차이 때문에 세상을 보는 방식이 다를 수도 있죠. 환자는 매우 독실한 종교인이지만 저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또는 스웨덴에서 자란 제가 한국에서 성장한 환자를 만난다면, 가족이나 사회, 질병을 바라보는 방식 자체가 다를 수 있습니다. 이런 차이는 반드시 걸림돌이 되는 건 아닙니다. 전 더 호기심이 생기는 편입니다. ‘이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겠는데, 흥미롭다’고 여기면서 함께 탐색해 나가려 하죠. 핵심 메시지는 우리가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다는 것이고요. 문화적 차이는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을 통해 새로운 관점을 발견하고, 그 안의 긍정적인 가능성을 함께 탐색하는 겁니다.”
- 모든 인간관계에도 적용되는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물론입니다. 다만 한국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스웨덴과 서구 여러 국가 사회가 ‘투명성(transparency)’이라는 가치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죠. 솔직하고 개방적이어야 하며, 자신의 내면을 그대로 드러내는 게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문화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가치가 다소 과대평가되었다고 봐요. 언제나 늘 완전히 투명해질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어쩌면 하나의 환상일 수도 있기 때문이죠. 의학적인 세계관과도 닿아 있습니다. 정신의학은 오랫동안 생물학적 관점에 익숙해져 왔습니다. 정신질환도 혈액검사로 진단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거나, 현미경으로 다른 사람 뇌를 들여다보거나 X선을 찍으면 ‘아, 문제가 바로 이것이구나’ 하고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곤 하죠. 대화를 하기보다는 객관적인 검사로 모든 것을 설명하기를 기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항상 그런 투명성을 추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서로에게 말하지 않는 비밀이 있어도 충분히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 논문 ‘DSM-5 문화정식화면담은 치료적 가능성이 있는가(Could the DSM-5 Cultural Formulation Interview Hold Therapeutic Potential?)’에선 진단은 환자와 치료자가 함께 한 사람의 삶과 경험, 고통의 의미를 이해해가는 공동의 과정이 될 수도 있다고도 하셨는데요.
“이 논문은 문화정식화면담(Cultural Formulation Interview, CFI)에 관한 내용입니다. CFI는 정신의학에서 환자와 함께 진행하는 면담으로, 환자가 자신의 고통을 문화적으로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탐색하기 위한 도구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스웨덴에서 진료하고 있고, 환자가 한국 출신이라고 해봅시다. 그렇다면 저는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이런 상태를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또는 ‘지금은 스웨덴에 살고 있지만, 한국 친구들에게 자신의 상태를 설명한다면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우울증이라고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다른 표현을 쓰시겠습니까’. 이처럼 환자의 경험이 환자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함께 탐색하는 거죠. 또 다른 예로, 스웨덴 사람이라도 신앙심이 매우 깊은 환자라면 이렇게 물을 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우울증을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그러면 그 환자는 신이나 종교적인 의미를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즉, 이 면담은 환자가 자신의 질병을 어떻게 이해하지를 알아보려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이런 방법을 자주 잊어버립니다. 의사인 저는 ‘당신은 우울증입니다. 뇌의 신경전달물질 문제 때문일 수도 있고, 삶에서 겪은 어려운 경험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약물치료나 심리치료로 좋아질 수 있습니다’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환자 자신은 이 병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이는지,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는 묻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CFI는 바로 그것을 탐색하려는 도구입니다. 제가 이 면담이 치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많은 환자들이 이런 질문을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가족에게는 이것을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라고 물으면, 환자는 그 질문을 처음 받아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당신의 문화적 정체성이 지금의 고통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으면, 그 역시 처음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가 그 질문을 계속 생각해보고, 다음 진료 때 다시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 질문 자체가 환자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기 시작하죠. 예를 들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어요. ‘제가 자란 곳에서는 감정을 드러내면 안 됩니다. 그냥 참고 견디는 것이 당연했습니다‘거나 ‘우리 언어에는 우울증이라는 말 자체가 없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아요’라고요. 이런 과정을 통해 환자는 자기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저는 바로 그런 점에서 진단 과정 자체도 치료 의미를 가질 수 있죠.”
- 섭식장애뿐 아니라 PTSD와 우울증 등 다양한 정신건강 분야를 연구해 오셨습니다. 연구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핵심적인 질문이나 문제의식은 무엇인지요.
“역시 문화라고 생각합니다. PTSD든 우울증이든, 다른 어떤 정신질환이든 저는 사회와 문화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우리가 고통을 어떻게 이해하고 표현하는지에 관심이 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주제는 낙인(stigma)입니다. 어떤 진단은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반면, 어떤 진단은 오히려 긍정적으로 여겨지는 현상에도 관심이 있습니다. 한국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스웨덴에서는 ADHD 진단이 많이 늘어나는 흐름이 있습니다. 학교에서 의료기관에 ‘이 학생을 ADHD인지 평가해 달라’고 요청하는 경우도 많아요. 학생을 이해하고 적절히 도와주기 위해 ADHD라는 진단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거죠. 또 어떤 사람들은 스스로도 ADHD 진단을 받고 싶어 합니다. ‘ADHD라는 진단을 받으면 나 자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사람들이 진단을 원한다는 것은 꽤 흥미로운 현상이에요. 암 진단을 받고 싶어 하는 사람도 없고, 심장병 진단을 받고 싶어 하는 사람도 없으며, 우울증 진단을 받고 싶어 하는 사람도 거의 없습니다. 제 말이 너무 냉소적으로 들리고 싶지는 않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설명할 이유를 원하기 때문에 ‘진단‘을 원하기도 해요. ‘나는 이런 진단을 받았어’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설명을 원하는 것이죠. 스웨덴에서는 분명 그런 현상이 어느 정도 나타나요. 어떤 진단은 여전히 강한 낙인의 대상이지만, 어떤 진단은 오히려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해요. 섭식장애는 그 중간쯤에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는 섭식장애가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완벽주의적이고 성취 지향적인 사람이라는 이미지와 연결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여전히 부정적으로 인식되고, 스웨덴에서도 낙인이 남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사례가 자폐 스펙트럼입니다. 스웨덴에서는 자신의 자폐 특성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마치 하나의 하위문화처럼 받아들여지는 일도 있죠. 예술적 재능이 뛰어나거나, 수학이나 음악에 특별한 능력이 있는 사람, 일종의 ‘초능력(superpower)’과 연결해서 이야기되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정체성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요. 반드시 나쁘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진단명 자체를 원하게 되는 현상은 비교적 최근에 나타난 새로운 문화적 현상이에요. 보통 병원에 갔을 때 의사가 ‘진단 결과 아무것도 없습니다’라고 말하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정신의학에서는 오히려 사람들이 갖고 싶어 하는 진단명이 존재합니다. 저는 그것이 문화적 관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현상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문제의식이 제 여러 연구를 하나로 연결해 주는 중요한 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트라우마도 연구하셨죠. 한국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여러 대형 재난과 트라우마 사건을 겪었는데요.
“트라우마를 경험한 대부분 사람들이 이후에 심각한 심리적 문제를 겪는 건 아닙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예를 들어 광주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그곳 사람들은 상처를 입었고 고통을 겪었습니다. 가족이나 자신, 혹은 공동체가 겪은 일에 대해 끔찍한 기억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동시에 그 안에는 강함과 자부심도 있다고 생각해요. 5·18민주화 운동은 한 나라의 역사이고, 저는 많은 한국인이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느꼈습니다. 사람들은 끔찍한 일을 견뎌냈고, 그 결과 오늘날의 한국이 더 나은 사회가 되었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이뤄낸 성취이기도 합니다. 트라우마가 반드시 우울증이나 PTSD 같은 심리적 고통으로만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광주를 방문하면서 제가 받은 인상은, 사람들이 자신의 역사와 유산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그 안에서 어떤 힘을 얻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하나의 흔한 오해는 트라우마를 겪으면 항상 PTSD로 이어진다고 여기는 겁니다. 즉, 계속해서 사건이 떠오르는 플래시백을 경험하고 악몽을 꾸는 식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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